경이로운 공습 기록 남기고도 매춘부로 매도된 전장의 여군들 [BOOK]

여자들은 언제나 싸웠다
세라 퍼시 지음
정해영 옮김
메멘토
영국 런던 도심에 있는 ‘2차 대전 여성기념비’만큼 전쟁과 여성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없다. 종전 60년 만인 2005년에야 비로소 세워진 기념비는 군복·간호복·경찰복·용접 마스크·농사 작업복 등 17벌의 옷이 걸린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는 전시에 여성이 수행한 역할을 의미한다. 단지 그들의 노고를 기리는 것은 아니다. 전쟁이 끝난 뒤엔 이 옷을 벗어놓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는 의미도 함축한다. 한마디로 전장은 여자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얘기다.
호주 퀸즐랜드대 국제관계학 교수인 저자는 이런 통념을 깨뜨린다. 인류 역사와 함께 이어진 수많은 전쟁에서 여성이 어떤 역할을 했고, 무엇을 성취했는지 보여주면서다. 활약상을 찬양하는 것만은 아니다. 책은 남성 군사 지도자들이 여성의 전투 참여를 어떻게 의식, 무의식적으로 은폐하고 왜곡해왔는지도 살핀다.
거기에는 시기와 국가가 따로 없었다. 1세기 켈트족 왕비였던 부디카는 죽은 남편 대신 군대를 지휘해 로마를 상대로 연승을 거뒀다. 런던까지 점령했지만 끝내 진압되고 말았다. 부디카의 리더십은 후대 역사가들의 골칫거리였다. 그들은 여성의 전투 참여를 허용한 건 야만성이라 강조하고 공적은 얼버무렸다.
전쟁이 일상이던 18세기까지 유럽에서 여성의 전투 참여는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터에는 늘 여성이 있었다. 그들은 의료 지원과 식량 공급, 세탁은 물론 최전선 전투까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전투 참여를 위해 남장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남북전쟁 때는 그 수가 250~1000명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19세기 후반 유럽 군대가 병사들에게 콧수염을 기르게 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성의 사회 참여가 시작된 현대에 들어서도 여성의 전장 참여는 보수적으로 이뤄졌다. 1차 대전 중 프랑스는 20만명의 여성을 전쟁에 동원했지만, 그들의 임무는 타자수나 조리사, 전화교환수, 비서 등이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숙련된 조종사 중 한 명인 마리 마르뱅이란 여성이 공군에 지원했는데 군은 그녀의 비행기만 징발하고 입대는 거부했다. 우여곡절 끝에 두 차례 공습에 참여해 무공훈장까지 받았지만, 그녀가 참여한 폭격 작전 정보는 1932년에야 공개됐다.

2차 대전에선 여성의 참여 범위가 넓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비전투원으로 남았다. 여성을 보호한다는 이런 명분은 오히려 치명적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대공포대에서 맹활약한 영국의 여성 탐조등부대는 야간에 강한 조명으로 적기를 찾아내면서도 사격은 허용되지 않아 오히려 손쉬운 먹잇감이 됐다. 게다가 이런 비전투원이 총기를 사용하다 포로가 되는 경우는 헤이그협약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즉결처형될 수 있었다. 히틀러 역시 여성의 전투 참여에 극도의 거부감을 보였다. 그런 탓에 성인 여성 대신 끌려간 14세 미만의 어린 소년들이 전장에서 희생됐다.
반면 여성의 전투 참여가 허용된 소련에선 활약이 두드러졌다. 약 12만명의 여성이 전투 조종사, 저격병 등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이는 전투에 참여한 전체 미군 남성 수와 비슷하다. ‘밤의 마녀들’이라 불리던 여성 폭격기연대는 2만4000회라는 경이로운 공습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탱크 운전병, 전투 조종사의 여성형 명사가 그때 생겼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사회의 시선이 부정적으로 돌변했다. 전투에 참여한 여성 병사가 매춘부로 매도되기도 했다.
전쟁에서 전방과 후방의 개념이 사라지고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경계가 모호해진 오늘날에도 여성의 참여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여성을 보호하지 못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국가를 위해 싸우고 공로를 세울 기회만 박탈당할 뿐이라는 것.
책은 남성 위주의 군사 역사를 해체하거나 폄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확장하고 심화한다. 전쟁이 남성적 활동이라는 고정관념이 한계에 도달한 지 오래인 까닭이다. 책이 여성이 군대에 속할 때 벌어질 수 있는 문제점을 짚는데 다소 소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호와 기사도라는 미명 아래 힘겹게 돌아가던 가부장제의 작동 원리가 끼어들 틈이 생기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