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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는 허구의 강을 흐른다… 박학다식 작가의 '빅히스토리풍 비평 에세이'

[책과 세상] 호르헤 볼피 '호모 픽투스, 상상하는 인간'
멕시코 출신 작가 호르헤 볼피는 역사, 철학, 과학에 대한 깊이 있는 독서를 바탕으로 픽션과 논픽션을 아우르는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은 볼피가 2011년 미국 마이애미 북페어에 참석해서 발언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멕시코 출신 작가 호르헤 볼피는 역사, 철학, 과학에 대한 깊이 있는 독서를 바탕으로 픽션과 논픽션을 아우르는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은 볼피가 2011년 미국 마이애미 북페어에 참석해서 발언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멕시코 작가 호르헤 볼피(58)는 1990년대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혁신을 도모한 젊은 작가 그룹 '크랙 세대'의 기수로 명성을 얻었다. 1960, 70년대 이른바 '붐(Boom)'이라 불리는 전성기를 거치며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마술적 사실주의나 민족주의 틀에 갇힌 상황을 거부하면서 세계성·보편성을 추구하는 문학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한국어판 기준 1,000쪽을 넘는 볼피의 이 책은 장르가 모호하다. 원제 '만물의 발명: 픽션의 역사'가 시사하듯이 픽션(허구)의 창작 및 전파라는 관점에서 인류사를 꿰뚫어 보려는 기획을 담고 있지만, 그렇다고 빅히스토리를 다룬 본격 역사책이라 규정하기는 애매하다. 작가가 언급한 책, 영화, 음악, 공연, 게임을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창작연대순으로 길게 나열한 부록 '허구의 연대기'가 보여주듯이 작가가 지식을 섭렵해온 '개인적 체험'이 책의 핵심 질료를 이루기 때문이다.

'빅히스토리풍 비평 에세이'라 표현하면 적합할까 싶은 이 책에서 볼피는 문학뿐 아니라 과학, 철학, 역사에도 조예가 깊은 르네상스맨적 면모를 십분 발휘한다. 양자역학 역사와 2차대전 나치독일 역사를 정교한 미스터리 기법으로 엮은 소설 대표작 '클링조르를 찾아서'(들녘 발행)를 읽었던 독자라면 볼피의 책이 국내에 거의 번역되지 않았다는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겠다.

볼피는 허구를 거짓말과, 현실을 진실과 구분 지으며 출발한다. 어떤 진릿값에 구애받지 않고, 허구를 창조하는 인간의 이야기 본능이 어떻게 인류 역사(현실)의 동력이 되는지 추적하는 것이 관심사라고 천명한 셈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빚어낸 산물"이자 "서로 연결된 허구들의 집합체"(21쪽)라고, 뇌과학 대중화로 요즘 독자에게도 익숙한 명제를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관점에서 "원시인들의 동굴은 플라톤의 동굴을 거꾸로 뒤집은 것"이라는 전복적 사고가 탄생한다. 들소를 사냥한 성공담을 벽화로 그린 게 아니라, 벽화를 그리며 들소를 잡을 방도를 찾아냈다는 것. "벽에 비친 그림자는 곧 현실이 된다."(이상 79쪽) 신화는 "우리가 만들어낸 가장 정교한 허구"(99쪽), 함무라비 법전은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고 창조하는 완전한 소설"(127쪽), 신은 "우리가 만들어낸 가장 전염성이 강한 허구"(137쪽)다. 뉴턴의 사과가 사람들을 그토록 매료시킨 것도 이야기의 힘이라고 볼피는 간파한다. "지식의 나무 그늘 속에 앉아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을 밝혀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원점회귀의 감각을 선사해주기 때문이다."(627쪽)

어떤 허구라도 괜찮다거나 어쩔 수 없다는 건 결코 아니다. 히틀러, 레닌, 무솔리니, 스탈린 등 20세기 최악의 독재자들이 공통적으로 예술적 허영심을 갖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스스로를 당대 최고의 비평가, 즉 단순히 권고할 뿐만 아니라 저급한 취향을 제거할 권력을 가진 심판자로 자처한다."(905쪽) 작가가 "가장 심하게 타락하고 왜곡된 버전의 허구"(927쪽)라고 일갈하는 건 오늘날 전 지구를 뒤덮은 포퓰리즘이다. "다수가 모두를 위해 통치한다는 것이 민주주의 허구라면, 포퓰리즘은 그 다수가 오직 자기 자신들만을 위해 통치하게 하려 한다."(925쪽)

상상하는 인간·호르헤 볼피 지음·엄지영 옮김·엘리 발행·1,032쪽·4만4,000원
상상하는 인간·호르헤 볼피 지음·엄지영 옮김·엘리 발행·1,032쪽·4만4,000원
호모 픽투스, 상상하는 인간 표지호모 픽투스, 상상하는 인간호르헤 볼피, 엄지영YES24에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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