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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품에서 찾은 '비움'의 윤리… 김홍중이 호명한 '시대횡단자'

[신간 '시대횡단' 출간한 김홍중 서울대 교수] 21세기 탄소자본주의 대안으로 '케노시스' 제시 한강·박찬욱·이자혜 등 예술 작품서 징후 읽어내 "몸 가진 인간에게 케노시스는 보편적 과정"
김홍중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지난달 28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4월학생혁명기념탑 앞에서 본보와 인터뷰 전 신간 '시대횡단'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수본 인턴기자
김홍중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지난달 28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4월학생혁명기념탑 앞에서 본보와 인터뷰 전 신간 '시대횡단'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수본 인턴기자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 속 영혜는 어느 날 날고기를 뜯어먹는 꿈을 꾼 뒤 돌연 육식을 거부한다. 가족들은 영혜의 이상행동에 그를 다시 '일상'의 범주 안으로 밀어 넣으려 하지만, 영혜는 끝내 '나무되기'를 선언한다. 구급차에 실려 가는 영혜의 모습에선 죽음의 냄새가 진동한다.

한국에 비건이라는 개념이 널리 알려진 게 2010년대 초중반. 한강은 그보다 앞선 2007년 출간한 소설에서 육식의 비윤리성과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다뤘다. 욕망을 거세한 인물을 앞세운 그의 문제의식은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현 인터내셔널 부커상),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시대정신의 선구성을 인정받았다.

김홍중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의 신간 '시대횡단'은 한강의 작품을 비롯한 문화예술을 통해 시대의 전환을 읽어낸다. 영혜의 실천을 성서에 뿌리를 둔 '케노시스'(자기-비움) 개념으로 풀이하며, 탄소자본주의 문명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21세기 생태 파국 앞에서 자기보존·강화(코나투스)를 강조하는 근대 철학은 효력을 다했다는 분석이다.

나아가 그는 지배적 가치를 부정하며 시대 경계를 넘어서는 주체를 '시대횡단자'로 호명하고, 시대 균열이 가장 먼저 감지되는 영역으로 예술을 주목한다. 철학과 신학을 경유해 한강과 박찬욱, 웹툰 작가 이자혜에 이르는 신간을 펼쳐 놓고 지난달 28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에서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 연합뉴스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에서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 연합뉴스

-전작들과의 차이는.

"사회학자로서 경계선을 넘어 신학과 미학을 깊게 파고든 점이다. 지난 10년간 작품으로부터 사회와 시대를 읽는 통찰을 고민했다. 이번 책엔 개별 작품에 대한 비평이 아니라, 사회학자가 작품을 통해 기존 생각이 깨지면서 시대와 사회를 잇는 새 방식과 각도를 발견한 내용을 담았다."

-집필 계기는.

"결정적인 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채식주의자'를 다시 읽은 것이다. 그간 한국의 예술과 문학 작품 중 나를 움직인 건 모두 자기 시대 바깥으로 고통이나 문제를 뚫고 나가는 형상을 창조한 것들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자연스럽게 시대횡단이란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왜 하필 '시대횡단자'인가.

"프랑스 철학자 샹탈 자케의 책 '계급횡단자'가 있다. 난 계급이 아닌 시간을 가로지르는 사람을 가리키고자 했다. 앞선 시대를 불운한 예언자처럼 살아간 이가 있는 반면, 그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지나간 시대에 머무는 이가 있지 않나. 우리 시대는 그들 간 긴장이 강렬하다고 생각했다."

-시대(epoch) 구분이 중요하겠다.

"그 어원에 '중단'이란 의미가 있다. 즉, 어떤 사건에 의해 열려 다른 사건에 의해 닫히기까지 시간 단위가 시대다. 21세기는 9·11테러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같은 세계적 사건에 의해 촉발된 듯하다. 한국은 세월호를 포함한, 2010년대 이후 사회적 재난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김홍중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지난달 28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연구실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수본 인턴기자
김홍중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지난달 28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연구실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수본 인턴기자

-시대횡단자가 체험하는 케노시스는 '봄의 겪음'을 통해 형성된다고 했는데.

"서구 근대철학에서 '본다'는 건 상대를 구성하는, 권력의 가장 강력한 작동 방식이다. 반면, 피사체가 나에게 영향을 미쳐 내가 변형되는 과정이 케노시스다. 꼭 시각 얘기가 아니다. 기존 방식이 파괴되는 탈주체 상황인 거지. 우리 세대에겐 5·18광주민주화운동 비디오가 그랬다."

-각자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지 않겠나. 케노시스를 일으키는 보편적 조건이 있을까.

"인간은 인공지능(AI)과 달리 몸을 갖고 있고, 몸의 기능은 필연적으로 정지한다. 또 나를 해칠 수 있는 사람과도 관계를 맺어야 하니 자아를 100% 보호할 수도 없다. 비록 생명의 본질이 소멸이란 사실 자체를 망각한 문명에 살고 있지만, 케노시스는 유기체가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한국은 케노시스가 발아할 만한 토양을 갖췄나.

"(전쟁, 독재, 급격한 경제성장 등을 겪으며) '생존주의'가 강력히 작동하는 만큼 전환이 무척 힘들 거다. 다만 최근 청년 여성 집단에 주목하고 있다. 86세대 및 또래 남성과 때론 대립하면서 만들어가는 움직임들이 '코나투스 리얼리즘'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본다."

시대횡단·김홍중 지음·문학동네 발행·492쪽·2만4,000원
시대횡단·김홍중 지음·문학동네 발행·492쪽·2만4,000원

-그런데 정작 책에선 케노시스를 명상이나 기도와 헷갈려선 안 된다며 선을 그었다.

"지금은 자연스러운 '인간 자유'라는 말이 중세엔 헛소리로 치부되지 않았나. 케노시스 역시 우리 질서 바깥의 개념이란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 현실에선 윤리적 삶을 논하는 데 있어 케노시스의 실천을 가져올 때가 됐다. 자기 존재 그리고 관계에서 '비움' '삭감'의 가능성을 의식해야 한다."

-책에서 언급한 작품 외에 추천작은.

"200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작가 존 맥스웰 쿳시의 '추락'. 남성성의 케노시스를 다뤘다. 성폭력을 소재로 사용했어야 하느냐는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케노시스 서사엔 폭력적인 비워짐이 들어오곤 한다. 예소연과 성해나 작가 작품들도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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