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빽한 무법지대 魔窟 구룡성채…가운데 공간은 왜 비워두었을까
5만명 살던 삼합회 근거지
홍콩 누아르 영화의 배경
중앙엔 청나라 관청 '아문'
마약중독자 진료소로 사용
中소유 땅이어서 증축 못해
유일하게 하늘 보이던 건물

한때 5만명이 살던 범죄의 온상이자 '마굴(魔窟)'로도 불렸던 무시무시한 공간. 홍콩의 '구룡성채(구룡채성)'는 지금은 철거돼 공원으로 바뀌었으나 한때 세계 3대 범죄조직 삼합회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그런데 위 사진을 자세히 보자. 중앙부의 우측을 보면 빈 공간이 눈에 띈다. 증축에 증축을 거듭해 빈틈이라곤 없는 구룡성채에도 끝내 '삼켜지지 않은' 공간이 남아 있던 것이다.
무법천지의 대명사이자 홍콩 영화 전성기를 일으킨 근원지, 지금은 소멸해 기억 저편으로 흘러갔음에도 여전히 묘한 호기심을 품게 만드는 구룡성채에 대한 독특한 책이 출간됐다. 신간 '구룡성채, 검은 성의 비밀'이다. 한국 학자인 저자가 오직 '어떻게 국가 안에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곳이 존재할 수 있는가'란 질문 하나를 붙잡고, 이제는 사라진 구룡성채를 답사하며 써내려간 르포르타주다.
구룡성채를 이해하려면 역사의 기막힌 사연들을 소환해야 한다. 우선 변곡점은 1898년 청나라와 영국이 맺은 '홍콩경계확장조약'이다. 영국은 홍콩섬과 구룡반도 남부를 할양받은 상태였는데, 이 조약에는 예외조건이 하나 있었다. 구룡성채만큼은 '중국의 관할권 행사'를 허용한 것. 이게 무법지대 탄생의 씨앗이 된다.
시간이 흘러 1945년, 일본 패망으로 홍콩은 격랑에 휩싸였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홍콩 반환을 요구했지만 영국은 해군 파병과 홍콩 식민정부를 통해 이곳을 재장악했다.
이후 공산당이 정권을 잡고 6·25전쟁으로 중국이 전쟁에 뛰어든다. 중국으로서는 전선을 두 개로 쪼개기가 곤란했다. 중국은 자국 영토로 인정된 구룡성채를 마지노선으로 삼고, 영국이 이 땅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는 선에서 홍콩 문제를 봉합했다. 홍콩 식민정부 역시 구룡성채 철거 시도로 본토를 자극하는 건 부담이었다. 이에 구룡성채는 누구도 손을 못 대는, 꽉 차 있지만 텅 빈 공간이 된다.

곽한영 지음, 흐름출판 펴냄, 2만2000원'>
처음부터 구룡성채가 빼곡한 건물의 덩어리였던 건 아니었다. 1950년대 인근 빈민촌에서 큰 화재가 연달아 발생하고, 이후 문화대혁명으로 수천수만 명의 이주민이 발생하면서 구룡성채도 집결지가 된다. 치외법권 지역이니 채광, 일조, 소방 등의 건축법은 무시됐다. 사람들은 비용을 투자해 건물을 지어 팔거나 세를 놓기 시작했다. 땅이 부족해지자 나중엔 'ㄷ자' 모양의 건물 사이에 벽을 덧붙이거나, 두 건물 사이의 앞뒤에 벽만 붙여서 날림 공사를 감행한다. 직사각형 공간이 꽉 차자 사람들은 다시 위로 향했고 '증축 위의 증축'이 일상이 됐다.
범죄자들이 모여들면서 범죄의 삼박자라 할 '도박, 매춘, 마약'이 구룡성채를 먹어 치우기 시작한다. 홍콩 식민정부가 치안을 아예 포기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살인자를 잡아들여 본토로 추방해도 다시 돌아와 구룡성채에 숨어드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자 홍콩 경찰은 구룡성채를 장악한 삼합회와 손을 잡았다.
그런 복잡성 속에서도 구룡성채 중앙의 건물만은 소용돌이에서 비껴갔다. 이곳은 청나라 관청인 '아문(衙門)'이 위치했던 곳으로 고아원, 양로원, 학교 그리고 마약 중독자 진료 시설로 사용됐다. 중국이 소유한 상징적인 땅이어서 그곳만큼은 증축을 피해갔다. 구룡성채 내에서 유일하게 하늘을 볼 수 있는 건물이었다.
홍콩 영화 산업도 삼합회와 관련이 깊었다. 경극 배우들은 몸짓만으로 표현이 가능한 무술영화에 참여했다. 성룡과 홍금보도 경극 배우 출신이다. 홍콩영화가 부상하면서 삼합회는 영화에 투자하거나 아예 영화사를 차렸고, 배우들 관리를 독점했다.
특히 1980년대 등장한 '홍콩 누아르'는 홍콩 반환의 두려움에 기반했다. 책에는 홍콩 누아르의 대표작인 왕가위 감독, 양조위 주연의 '아비정전' 일화가 자세하다. 구룡성채는 영화인들을 매료시켰지만, 영화를 찍으려면 삼합회의 지원을 등에 업어야 했다. 삼합회는 구룡성채 배경의 액션영화를 기대했지만 왕가위 감독은 느린 템포의 영화를 만들었고, 흥행이 부진해지자 삼합회를 피해 피신했다. '걸작 탄생' 이면의 아이러니인 셈.
그렇다고 해서 그곳에 '삶'이 없었던 건 아니다. '가로 213m, 세로 126m' 직사각형 모양의 땅에 무려 5만명이 살았고, 일반인 수는 삼합회 조직원 수를 압도했다. 인구밀도를 환산하면 서울에 인구 10억명이 사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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