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의 타임머신] 밸푸어 선언

1917년 11월 2일, 영국 런던의 피카딜리 148번지. 라이오넬 월터 로스차일드 2대 남작의 저택으로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됐다. 타자로 작성되고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사진)가 서명한 공식 서한의 길이는 영어 단어 67자. 짧은 분량이었지만 그 여파는 매우 컸다. 이른바 ‘밸푸어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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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의 집(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을 세우는 것을 지지하며 목표 달성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둘째, 유대 국가를 꿈꾸는 시오니스트들은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권과 종교적 권리를 보장한다.” 셋째, 편지의 수신자 로스차일드 남작은 이 내용을 시온주의 연맹(Zionist Federation)에 알린다.
실로 의미심장한 내용이었다. 영국 정부는 시오니스트의 편에서 시온주의 연맹을 외교적으로 인지했고, 금융 자본가 로스차일드 남작을 그 대표자로 인정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염원인 유대 국가 건설을 위한 기초 작업이 성공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재정난에 시달리던 영국은 유대계 금융 자본의 조력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유대인을 위한 민족의 집”이 무엇인지 의미가 분명치 않은데, 장소만은 팔레스타인이라고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시오니스트는 당연히 군대와 경찰, 국경과 독자적인 법질서를 지닌 국민국가를 원했다. 반면 영국은 유대인들에게 “민족의 집”을 약속했을 따름이었고, 시오니스트와 팔레스타인 정착민의 갈등에는 관심이 없었다. 영국의 의도적 모호함이 명백한 비극의 씨앗이 된 것이다.
“만약 제가 런던 대신 파리를 (영국인의 터전으로) 제안하면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왜 팔레스타인을 고집하느냐는 밸푸어의 질문에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을 지낸 하임 바이츠만이 내놓은 대답이다.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부터 나치의 홀로코스트까지, 반유대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유럽의 상황을 고려할 때, 시오니스트의 유대 국가 건설 운동은 수긍할 만한 면이 있었다. 문제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권과 종교적 권리”가 현재 제대로 보호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전 세계의 관심과 협력이 절실하다.
노정태 작가·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